그림감상예술생활

무동 – 조선시대 단원 김홍도 풍속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로 꼽는 김홍도는 우리에게는 풍속화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이로인해 김홍도는 풍속화를 그린 화가로만 알려져있는데 하지만 전문 연구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김홍도를 천재로 부르는 이유는 풍속화만이 아닌 모든 방면의 그림에 능숙했다고 합니다. 산수화나 인물화 특히 신선도를 잘그렸고 동물의 정밀묘사등등 모든분야에  두루두루 갖춘 최고의 화원이었습니다.

 

풍속화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단원을 총애하던 정조의 명으로 일반 백성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렸는데 현재 남은건 똑같이 모사한 당대 화원들의 작품이 상당수입니다. 지금의 복사와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원은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코흘리개 시절부터 배웠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강세황은 부인인 진주유씨의 그당시 본거지였던 경기도 안산에 살고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처가살이인 셈인데 당시에 처가살이는 크게 흉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세황은 최고의 문인화가인 동시에 당대 최고의 평론가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스승에게서 배웠기에 단원 김홍도는 중인 출신이지만 사대부들의 문인화가 가진 정신적인 측면도 상당부분 몸에 배이있는 상태였습니다.

 

당대 안산에는 현재는 실학자로 불리는 성호 이익을 비롯해 진주유씨 가문의 많은 문인들이 살고있었고 당시 명문가였던 진주유씨가문은 조선시대 4대 만권당 가운데 두군데인 청문당과 경성당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안산에 유적지가 남아있는 곳이기도합니다.  진주유씨가 안산에 자리잡은 이유는 진안위 유적이 선조 임금의 사위가 되면서 부인인 정정옹주가 임금과 멀리에서 살기는 힘든지라 사패지로 받은 안산으로 옮겨 한양 부근으로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아직도 안산 부곡동에는 정정옹주의 묘가 남아있습니다.

 

안산 부곡동 정정옹주묘 영상 – https://youtu.be/vcaDxHF2-Mg

 

 

바로 앞에서 춤추고 있는 듯한 무동의 모습과 악단의 표정이 모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바로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중심이되는 무동을 정가운데 배치하지 않은 파격적인 구도는 김홍도가 가진 미적인 센스를 엿볼수 있습니다. 아마도 가운데에 배치했다면 다른 구성들이 모두 묻혀버렸을것입니다. 구석에 배치함으로써 다른 요소도 살아나고 무동도 살아있습니다.   

 

김홍도는 많은 군중속에서도 눈에 띌만큼 인물도 매우 출중하고 그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포의풍류도에 나오는 생황같은 악기 연주에도 수준급 실력을 가졌다고 합니다. 정조 사후 말년에 힘이 들었지만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중인 출신으로 많은 것을 성취하고 실력에 걸맞게 누리면서 살기도 했습니다.

 

 

김홍도 풍속화 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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